언컷 젬스 결말과 욕망의 폭주가 멈추는 가장 잔혹한 방식
언컷 젬스
뉴욕의 소음이 설계한 인지 과부하와 청각적 폭력의 미학
사프디 형제 감독이 그려내는 뉴욕은 낭만과는 거리가 먼, 날 선 신경증이 지배하는 거대한 도가니와 같다. 언컷 젬스의 오프닝부터 관객을 덮치는 것은 정교하게 설계된 소음의 겹침이며, 이는 곧 주인공 하워드가 일생을 바쳐 유영하는 혼돈의 정체이기도 하다. 영화는 인물들의 대사를 의도적으로 충돌시키고 전자음악의 불협화음을 전면에 배치하여 시청자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이러한 연출은 단순히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을 넘어 하워드라는 인물의 내면을 물리적인 청각 신호로 치환한 결과물이다. 빚쟁이들의 고함과 보석상 보안문의 기계음, 그리고 끊이지 않는 전화 벨소리는 그가 처한 위태로운 경제적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한다. 관객은 정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인지 과부하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하워드가 느끼는 아드레날린의 중독 증세를 간접 체험하게 만드는 고도의 장치다.
사실주의를 표방한 사프디 형제의 카메라는 미학적 정돈을 거부하고 인물의 땀방울과 거친 숨소리를 집요하게 쫓는다. 화려한 다이아몬드 디스트릭트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조잡하고도 치열한 돈의 흐름은 다큐멘터리적인 생동감을 얻으며 극의 현실감을 부여한다. 세련된 영상미 대신 선택한 거친 질감의 화면은 도심 속 유령처럼 떠도는 투기꾼들의 불안한 정서를 효과적으로 박제해 냈다.
극 전반을 지배하는 이 소란스러운 행진은 단순히 관객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멈출 수 없는 욕망이 소음으로 치환되었을 때 발생하는 에너지를 보여준다. 인물들이 내뱉는 파편화된 언어들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각자의 욕망을 관철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된다. 이 시끄러운 불협화음 속에서 관객은 역설적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개인을 몰아세우는 방식에 대해 서늘한 공포를 느끼게 된다.
아담 샌들러가 증명한 중독자의 순수한 광기와 결핍
우리가 그동안 보아왔던 아담 샌들러의 유쾌한 마스크는 이 작품에서 지독한 결핍을 가리기 위한 비겁한 웃음으로 변모한다. 그는 보석상을 운영하며 끊임없이 신기루를 쫓는 하워드 역을 맡아 배우 인생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며 캐릭터의 입체성을 완성했다. 하워드는 단순한 도박꾼이 아니라 자신이 설계한 우연의 게임 속에 갇혀서만 살아있음을 느끼는 중독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다음 배팅을 위한 판돈을 마련하기 위해 세상을 속인다. 가족과의 관계나 애인과의 신뢰마저도 하워드에게는 하나의 협상 도구일 뿐이며, 이는 그의 내면이 얼마나 황폐해져 있는지를 증명한다. 아담 샌들러는 이 파렴치하고 비겁한 인물에게 기묘한 절박함을 부여하여 관객이 그를 미워하면서도 끝내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특히 하워드가 도박에 탐닉하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예술적 완성으로 믿는 대목에서 언컷 젬스는 인물의 광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그는 케빈 가넷의 우승 가능성에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오팔의 가치를 연결하며 논리가 통하지 않는 자신만의 우주를 구축한다. 이 과정에서 보여주는 그의 끈질긴 집념은 성취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파멸을 향해 돌진하는 폭주 기관차의 엔진 소리와도 닮아 있다.
주변의 채권자들이 그를 물리적으로 압박할수록 하워드의 기민함은 더욱 날카로워지며, 이는 그가 평범한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도의 각성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감독은 이러한 중독의 심리 구조를 세밀하게 해부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의 어리석은 선택에 동조하게 만드는 금기된 체험을 제공한다. 결국 하워드라는 인물은 성공을 갈구하는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자 통제 불가능한 욕망의 상징으로 남는다.
에티오피아의 원석과 가공되지 않은 욕망의 상관관계
영화의 서사를 추동하는 가장 강력한 소재는 광산에서 갓 발굴된 검은 빛의 오팔 원석이다. 이 보석은 세공되지 않은 채 하워드의 손에 들어오는데, 이는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탐욕을 상징하며 인물들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유인한다. 언컷 젬스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하워드 자신 또한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처럼 거칠고 위태로운 생명력을 내뿜으며 극 전체를 관통한다.
오팔의 광채는 케빈 가넷이라는 슈퍼스타를 홀리고 하워드에게는 인생 역전의 환상을 심어주지만, 그 결과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잔혹하다. 보석의 가치를 매기는 방식 또한 지극히 주관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이는 가치가 본질이 아닌 욕망에 의해 결정되는 시장 논리를 비판적으로 투영한다. 하워드는 보석의 잠재력을 믿었지만 정작 그 보석이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단초가 된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오팔의 이미지는 때때로 인물의 세포나 우주의 성운처럼 묘사되며 거대한 근원적 힘을 암시한다. 감독은 보석의 깊은 내부를 현미경처럼 들여다보는 연출을 통해 인간의 욕망이 닿을 수 없는 신비로운 영역과 비루한 현실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이 아름다운 돌을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인간들의 소동극은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얼마나 하찮고 덧없는 것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하워드는 보석을 경매에 넘기고 장인어른을 동원해 가격을 조작하는 등 비열한 수를 쓰지만, 보석은 그의 통제를 벗어나 끊임없이 유랑한다. 원석의 투박함은 하워드의 가식 없는 추악함을 비추는 거울이 되고, 그는 그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매료되어 결국 마지막 배팅을 멈추지 않는다. 세공되지 않은 욕망이 인간을 어디까지 타락시킬 수 있는지 오팔의 푸른 광채는 시종일관 서늘하게 증명해 낸다.
허망한 당첨금과 비정한 총성이 완성한 승리자의 역설
운명의 여신은 마지막 순간 하워드의 손을 들어주며 122만 달러라는 거액의 당첨금을 선사한다. 그가 자신의 사무실에 채권자들을 가둬놓고 경기에 몰입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광기 어린 승부사의 절정을 보여주며 관객에게 짧은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하지만 이 승리의 환희는 채 몇 분을 지속하지 못하고 인간의 자존심과 분노가 빚어낸 비정한 총성과 함께 순식간에 핏빛으로 물든다.
필이 당긴 방아쇠는 하워드의 관자놀이를 관통하며 그가 쌓아올린 모든 욕망의 탑을 단번에 무너뜨린다. 하워드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웃고 있었기에 그 죽음은 더욱 충격적이고 허무하게 다가온다. 그에게 있어 돈은 수단이었을 뿐 진정한 목표는 승리라는 자극이었음을 감안하면, 그는 자신의 가장 빛나는 순간에 생을 마감한 행복한 패배자일지도 모른다.
아르노까지 주저 없이 제거하는 필의 행동은 돈보다 우위에 있는 인간의 원한과 모욕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하워드가 목숨을 걸고 벌어들인 거금은 이제 누구의 것도 아닌 채 공중에 흩어지고, 보석상은 정적만이 흐르는 시체실로 변한다. 이 비정한 피날레는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이라 할지라도 결국 가장 원초적인 폭력 앞에서 모든 수치가 무력해진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결국 언컷 젬스가 남긴 유일한 승리자는 하워드가 아닌 그의 애인 줄리아였다는 사실은 인생의 지독한 아이러니를 완성한다. 그녀는 당첨금을 챙겨 화려하게 떠나지만 그 돈을 벌기 위해 삶을 내던진 남자는 차가운 바닥에 시체가 되어 남겨졌을 뿐이다. 끝까지 예측할 수 없는 전개와 비정한 마무리는 시청자에게 잊을 수 없는 정서적 충격을 안기며, 가공되지 않은 욕망의 끝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분명 음악, 드라마 장르인데 스릴러를 보는듯한 영화 위플래쉬 후기